함께 읽는 자리를 만든다는 것
번역 없이 공부하기(번공모) 4기의 첫 모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작년 9월에 진행했던 3기 이후 1년 넘게 멈춰 있던 모임이라 그런지 잘해내고 싶다는 마음이 크다.
번공모 3기를 마치고 고민이 많았다. 작은배가 여는 다른 모임이 그렇듯, 번공모도 내가 세상에 있길 바라던 모임이었다. 영어를 공부하는 대신 영어로 공부하는 모임. 시험에 나올 법한 괴상한 지문 대신 솔직한 주장과 경험을 담은 글에 빠져보는 모임. 같은 주제에 관해 쓰인 여러 글을 읽으며 내 생각을 점검하고 관점을 확장하는 모임. 함께했기 때문에 해낼 수 있었다고 말할 정도로 어렵지만 보람찬 모임. 아무도 시키지 않아도 시간이 나면 영어로 읽고 쓰는 것을 낙으로 삼던 나는 번공모가 내 삶에서 필수적인 톱니바퀴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번공모를 실제로 운영하면서 어려움이 있었다. 읽어야 하는 글이 생각보다 어려워서 좌절하는 참가자가 생길 때마다 어떻게든 도우려 했지만, 끝내 참여를 포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참가자 대부분이 숙제를 해오지 못해 홀로 글에 관해 한 시간 동안 떠들어야 했던 적도 있었다. 모두 함께 대화를 나누길 바랐지만, 결국 내가 한 질문에 스스로 답하고 있다는 걸 발견할 때면 내 부족한 진행 실력을 탓했다. 모집할 때 안내가 충분하지 않았나? 읽고 싶어 할 만한 글을 선정하지 못했나? 읽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고 싶었는데 오히려 학교에서처럼 지루한 숙제를 내준 건 아닐까? 내가 너무 긴장한 채 진행해서 사람들이 실망했나? 영어 공부를 기대하고 왔는데 내가 하는 말이 예상과 달라서 지루하다고 생각했나? 모임이 끝날 때마다 별의별 걱정을 했다.
번공모를 다시 열 자신은 없었지만, 모임을 열지 않는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작은배에서 나 혼자 진행하는 모임이 없다는 점이 마음에 걸렸다. 작은배가 항해를 계속하려면 모임을 열어야 한다. 그래야 새로운 사람들이 작은배를 발견하고, 기존 후원자들에게도 혜택을 줄 수 있다. 소신이 일상묘사를 진행하고 다른 창작자들과 협업하며 워크숍을 기획하는 와중에, 나는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것 같아 씁쓸했다. 그렇게 내가 어떤 모임을 열 수 있을까 계속 고민하다가, 소신과 이야기를 나눈 끝에 결국 번공모를 되살리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살고 싶은 삶은 읽고 쓰고 가르치는 삶이다. 그 삶에 가장 부합하는 모임이 번공모다. 3기까지 진행하며 약간의 우여곡절이 있었다고 묻어두기에는 번공모를 진행하던 시절에 느꼈던 기쁨과 성취감이 너무나 컸다. 완벽한 모임을 추구하다가 스스로 실망하기도 했지만, 함께했던 분들이 보내준 따뜻한 후기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번공모를 되살리기로 결심하고 어떤 변화를 줄지 고민했다. 1년이 지나고 나니 아쉽게 느꼈던 점들도 어렵지 않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처럼 보였다. 그래서 이번에는 모집할 때 매주 평균 20페이지를 읽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고, 글을 읽기 전에 참고할 수 있는 리딩 가이드도 매번 제공하기로 했다. 리딩 가이드에 담긴 작가와 글 소개, 질문들을 읽는 것만으로도 본문을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면 했다.
무엇보다도 모임을 진행하는 내 태도를 점검했다. 힘을 빼고, 처음에 바랐던 대로 대화를 이끄는 진행자의 역할을 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했다. 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던져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는 대신, 모두가 참여할 수 있는 대화 방식을 시도해 볼 예정이다. 지난 1년 사이 AI의 성능도 좋아진 만큼, AI나 사전을 활용해 어려운 문장을 이해하고 글을 더 수월하게 읽는 방법도 함께 나누려고 한다.
작은배에서 모임을 운영하며 느낀 것은 참여자가 모임에 더 깊이 관여할수록 만족도도 높아진다는 점이다. 무언가 말하고 싶은데도 기회를 얻지 못한 채 모임이 끝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모두가 하고 싶은 말을 충분히 나눌 수 있도록 돕는 것. 그것이 내가 번공모에서 이루고 싶은 목표다. 4기를 준비하는 지금, 나는 이번 모임이 흘러갈 모습을 하나로 정해두지 않고 싶다. 그저 수로를 만들듯 대화가 흘러갈 길을 미리 파두고 있다. 물이 어떤 모양으로 어떤 속도로 흐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가 확신하는 것은, 솔직한 글을 자세히 읽고 자신의 생각과 관점을 나누는 시간만으로도 삶이 바뀔 수 있다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