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오덕 선생님이 말했다
강소팟 32화 ‘교육자 이오덕의 본질’ 에피소드를 준비하며 기록한 이오덕 선생님의 생각이다. 글쓰기 교육과 자기표현에 관심이 있다면 하나하나 가슴에 와닿는 말이다.
이오덕 글 이야기 1994년
어른들이고 아이들이고 잘못되게 살아가는 세상에서 그래도 올바르게, 사람답게, 슬기롭게 살고 싶어하는 사람이 이 책을 읽어 주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왜냐하면, 글이란 참된 사람이 되기 위해 읽고 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투리야말로 가장 깨끗한, 살아있는 우리 말입니다.
꽃, 광명시 하안국민학교 4학년 김남조.
풀밭을 그냥 보면 볼 수 없는
꽃을 보았다
내 새끼손가락 손톱만한 분홍 꽃이다.
꽃이 작고 돌 옆에 숨어 있어서
잘 보이지 않는 꽃이다.
사람들이 그 꽃은 보지 않는 것 같아 꺾으려고 했지만
나같이 보는 사람도 있을 것 같아서
그 꽃을 꺾지 않았다.
꽃을 좋아하고, 그 꽃을 보는 사람들을 생각하는 알뜰한 마음이 나타나 있는 시라 하겠습니다. 그러나 좀더 잘 생각해 봅시다. 이 어린이가 꽃을 대하는 태도에 문제가 없는 것일까요?
이 시를 쓴 어린이는 꽃을 꺾지 않은 까닭이, 누가 와서 보게 될 것이라 생각한 때문이라 했지요. 그렇다면 아무도 보지 않을 꽃이라면 마음대로 꺾어도 좋고, 꺾고 싶다는 것이 아닙니까?/사람이 보아 주는 것은 그대로 살려 둘 가치가 있고, 사람이 보지 않는 것은 아무 쓸모가 없으니 꺾어 없애도 된다면, 이 얼마나 제멋대로 된 생각인가요? 이 얼마나 자기밖에 모르는 어리석은 태도인가요?/이렇게 되면 사람을 위해 꽃이고 동물이고 그 밖의 모든 자연이 죽어도 좋다는 것이 되지요. 이래서 오늘날 사람들은 자연을 더럽히고 자연을 죽입니다. 그 자연을 죽이면 사람도 죽고 마는데 말입니다.
표준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실제로 쓰는 말입니다. 언제가는 표준말도 실제로 하는 말대로 고쳐질 것이기 때문입니다./이 어린이는 책에서 읽은 글로 말을 배우지 않았습니다. 말을 귀로 듣고 입으로 하는 말에서 배우고, 그 말을 글로 쓴다는 것은 매우 올바른 태도입니다.
만약 사람이 자꾸 태어나기만 하고 죽지는 않는다면 이 세상은 사람으로 꽉 차서 움직일 수도 없이 될 것입니다. 그 지경이 되면 목숨이 귀한 것이 아니라 가장 끔찍하고 싫은 것, 무서운 것이 되지요. 그러니까 죽는 것이 사는 것입니다.
글을 논리로만 써서는 안 됩니다. 가슴으로 몸으로 써야 하지요. 가슴으로 몸으로 쓴다는 것은 정말 마음에서 우러난 생각을 정직하게 쓴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하고 싶은 말을 쓰면 그 말들이 서로 어긋나는 일이 없습니다.
귀엽다, 예쁘다, 아름답다. 이런 말들은 자기가 느낀 마음을 나타내는 말이기는 하지만 그저 막연하게 설명하는 말밖에 안됩니다. 귀엽다면 어째서 귀여운가를 말해야 정말 귀엽구나 하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귀엽다고 하는 말이 또 설명하는 꼴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렇게 귀여운 모습이라든가 짓이라든가 소리 같은 것을 그대로 눈앞에 선하게 보는 듯이 그려 보이면 그 글을 읽는 사람이 저절로 ‘고것들 참 귀엽구나’하고 느끼게 됩니다.
3학년 어린이라면 이런 글을 안 쓰는데, 어른들이 흠 없는 문장이 되도록 고쳐준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도 듭니다. 그렇지 않으면 학교에서 늘 어른스런 글짓기 훈련을 받아 그 요령을 익힌 우등생의 글이겠지요. 3학년 어린이다운 말이 없고, 어른들이 쓰는 말이 많은 것도 맛 없는 글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하기야 요즘은 어린이들 말이 모두 어른말 따라 오염이 되었으니 이렇게 쓰는 수도 있겠다 싶습니다.
그런데 국민학교 3학년생이 무슨 까닭으로 어른이 된 다음에 어떤 직업을 가질까 하는 생각을 해야 하나요? … 어른들이 더러 “너는 무엇이 될래?” 하여 묻고는, 그 대답을 듣고 재미있어하는 것은 아이들을 장난감으로 여기는 것이니 넘어가지 마세요.
시는 어린이를 살립니다. 갈 곳 없는 어린이에게 숨쉴 하늘을 열어 주는 것이 시라는 사실을 알아 두세요.
선생님이 안 계시는 교실에서 아이들이 떠드는 것은 당연합니다. 당연한 일을 못하게 하니까 억지스러운 짓이 되지요.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요? 그 것은 선생님들이 하실 일입니다. 선생님이 교실을 비우실 때는, 선생님이 안 계셔도 아이들이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어디서 어디까지 써라, 읽어라고 하지 말고), 스스로 재미가 나서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해 놓고 교실을 비워야 합니다. 그렇게 하지 못하고 덮어놓고 이름을 적게해서 조용하게 만든다면, 이런 교실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언제나 보이지 않는 힘에 억눌려 있어서 그 마음이 제대로 피어나지 못하고 성격이 비뚤어지기 쉽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 우선 무엇보다도 아이들에게 점수 따기 경쟁을 모질게 시키는 어른들이 한없이 미워지고, 병든 교육에 짓눌려 기를 못 펴고 있는 아이들이 가엾어 어찌할 수가 없습니다.
일기 쓰기는 참 좋은 공부입니다. 그러나 억지로 쓰게 하면 도리어 해로운 공부가 됩니다. 억지로 쓰게 하니까 또 그것을 검사하게 되지요. 검사란 것은 믿지를 못해서 조사하는 것이고, 그래서 거기 뭔가 잘못된 것을 찾아 낸다는 뜻이 들어 있는 말입니다. 일기장 검사는 제국주의 왜놈들이 하던 교육 방법입니다. 이렇게 검사를 하니까 거짓말을 쓰고, 선생님께 보이는 일기장과 진짜 쓰고 싶어서 쓰는 일기장, 두 가지를 가지는 어린이도 있게 됩니다.
글쓰기 어떻게 가르칠까 1993
아이들이 본디 그림을 그리기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고 싶어하는 것을 그리게 하지 않기 때문에 그림을 못 그리는 것 같이, 글도 본래 쓰기 싫어하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쓰기 어렵도록, 쓰고 싶은 것(쓸 수 있는 것)을 쓰게 하지 않고 남의 말과 남의 얘기를 써서 흉내를 내도록 하니 싫어질 수 밖에 없어요. … 일기도 효도한 얘기, 착한 일 한 얘기를 쓰게 하니 글쓰기가 고통스럽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바른 길을 가려고 하는데, 어른들이 그 길을 막고 있습니다.
아이들은 머리로 이야기를 꾸며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그대로 쓰는 것이다. 책에 나오는 말을 문법에 맞게 맞추어서 글을 쓰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입으로 늘 하고 있는 말을 그대로 쓰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의 글은 재미가 있고 감동을 준다.
우리의 학교는 말하기고 그리기고 글쓰기고를 물을 것 없이 모든 표현 교육이 참으로 수십 년 동안 버림받고 짓밟혀 왔고, 거짓된 것으로 병들어 버렸다. 아이들은 자기 표현이 거의 완전할 정도로 꽉 쳐막힌 상태에서 정상이 아닌 표현을 하면서 자라왔고, 자라나고 있다./이런 교육 형편을 바로 보고, 진정으로 걱정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 이 나라 모든 아이들의 목숨을 짓밟아 병들게 하는 온갖 잡동사니 지식 처넣기의 사람답지 못한 경쟁 교육을 바로잡겠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이것은 오늘날 어른들이 얼마나 아이들 잡는 살인 교육에 공범자로 깊이 관계하고 있는가를 말해주는 것이다.
온 나라 아이들이 표현을 제대로 못하는 교육을 하게 되면 그 나라는 숨이 막히고, 그 사회는 낭떠러지로 달려가는 꼴이 된다. 온 나라 아이들이 표현을 자유롭게 하는 교육을 했을 때 비로소 살아 숨쉬는 나라가 되고, 앞날이 환히 틔어진다.
아이들이 짓밟혀 죽어가고 있고, 아이들이 자기 표현을 할 수 없는 사회에서는 아동 문학이 아이들을 대신해서 아이들의 삶과 마음을 표현해 주어야 한다. 이 일을 못할 때 아동 문학도 가짜일 수밖에 없다.
글쓰기 교육의 목표는 아이들을 정직하고 진실한 사람으로 키우는 데 있다. 곧, 아이들의 삶을 가꾸는 것이다. 글을 쓸 거리를 찾고 정하는 단계에서, 쓸 거리를 생각하고 정리하는 가운데서, 실제로 글을 쓰면서, 쓴 것을 고치고 비판하고 감사하는 과정에서 삶과 생각을 키워가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소박하고 솔직하고 아름다운 마음을 잃지 않도록 할까? 풍부한 느낌을 가질 수 있게 할까? 사물의 참모습을 붙잡게 할까? 사람다운 행동을 하게 할까? 창조하는 태도를 가지게 할까? 이런 것이 목표가 된다. 참된 사람, 민주주의로 살아가는 사람을 기르는 데 글쓰기는 가장 좋은 수단이 되는 것이다.
글쓰기는 참으로 귀한 수단이다. 목표는 사람이고, 아이들이고, 아이들의 목숨이고, 그 목숨을 곱게 싱싱하게 피어나게 해 주는 것이지, 글이 목표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우리가 제대로 교육을 하자면 아이들의 마음을 알고 그들의 삶의 실상을 붙잡아야 한다. 아이들을 모르고 아이들을 가르칠 수 없다. 아이들의 마음과 삶의 참 모습을 알아내는 데는 아이들이 정직하게 쓴 글을 읽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다. 아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우리는 평소에 아이들의 삶을 살펴보기도 하고,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고, 가정 방문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아이들이 솔직하게 써 놓은 글은, 그것이 아니고는 다른 어떤 방법으로도 알아낼 수 없는 아이들의 마음과 삶을 잘 보여 준다.
아이들은 자기가 한 것을 솔직하게 쓰는 데서 기쁨을 느낀다. 그런 글을 쓰고 나면 위로를 얻는다. 남의 것을 흉내내거나 시킴을 받아서 억지로 머리를 짜내서 쓰는 데서는 고통이 있을 뿐이지만, 정말 쓰고 싶어서 쓰는 글에서는 자신과 용기를 얻게 되는 것이다. 열등감을 씻어 버리고, 건강한 마음으로 살게 되는 것이다.
글을 정직하게 쓰는 태도가 어느 정도 되었으면 그 다음에는 남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글, 곧 가치 있는 글을 쓰도록 지도하는 단계가 된다.
재미있는 글이 되자면 무엇보다도 글의 내용이 읽는 이들의 관심 거리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 자기 혼자만 관심을 가졌을 뿐, 남들은 도무지 알고 싶어하지 않을 것 같은 이야깃거리라면 가치가 없는 글감이다.
저 혼자만 잘 먹고 잘 입고 편안하게 살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 그래서 점수 많이 따서 남을 이겨내어 입신 출세를 하는 것이 단 하나 살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는 개인주의, 돈만 가지면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진다고 믿는 황금만능주의, 이러한 모든 비뚤어진 삶의 길을 비판해서 보도록 하는 교육이 없이 우리 아이들에게 사람다운 마음을 가지게 할 수 없고, 사람답게 살아가게 할 도리가 없다.
글쓰기는 국어과의 한 작은 갈래가 아니다. 글쓰기는 모든 교과와 삶에 이어지고, 모든 교과와 삶을 하나로 모으는 중심 교과다. 따라서 글쓰기 교육은 국어 시간이나 글쓰기라는 특정 시간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간에, 아이들을 만나는 모든 자리에서 한다고 보아야 옳다. 교육의 목표가 삶은 가꾸는 데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소박하고 단순하며, 남을 속이지 아니하고, 계산할 줄 모르고, 동정심 많은 마음이다. 만약 어린이가 꾀부리거나 거짓말을 하거나 사치하거나 헛된 욕심을 차린다면 그것은 모두 어른들이 가르치고 강요한 것이다. 어린이의 그 깨끗하고 아름답고 참된 마음을 지키고 가꾸는 것이 무엇보다도 앞서는 글쓰기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남에게 해를 입히는 행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민주로 살아가는 사람이다. 절대로 학급 깡패가 있어서는 안 된다.
쓰고 싶은 것, 쓰고 싶어서 못 견디는 것을 쓰게 하면 가장 좋다.
글 다듬기 지도는 매우 중요하지만 지도 교사가 바로 아이들의 글을 고치거나 고치게 할 경우 열 가지 중 여덟 가지는 잘못 고친다는 것이 내가 알고 있는 실정이다. 그래서 교사는 될 수 있는 대로 아이들의 글을 고치지 말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이 좋다. 자기의 글버릇을 아이들에게 강요하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
글 다듬기의 원칙. 글을 쓴 사람이 스스로 다듬도록 해야 한다. 토의해서 다듬을 때는 쓴 사람의 의견을 물어야 한다.
‘머리로 쓴 글’은 삶이 없이 쓴 글이다. 남의 글, 어른들의 글을 흉내낸 글이요, 책에서 배운 글을 따라 쓴 글이다. 방안에 앉아서 제멋대로 꾸며 만든 글이요, 진정이 담기지 않은 거짓된 글이다. 교과서는 이런 글을 쓰는 훈련을 시킨다. 이런 거짓글을 만들어 내는 짓을 억지로 하는 동안에 아이들은 자기의 삶을 정직하게 쓰면 글이 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되고, 그래서 항상 남의 것만 쳐다보게 된다. 이래서 자기의 삶을 부끄럽게 여기고, 가난한 이웃과 겨레를 멸시하게 된다. 주체성이 없는 허수아비 인간이 되고, 비참한 흉내만 내는 동물이 된다. / ‘가슴으로 쓰는 글’은 정직한 글이다. 남의 마음을 쓰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을 쓰고, 억지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터져 나오는 진정을 쓴다.
눈부신 황금으로 빛나는 글의 보물 창고는 먼 어느 나라의 화려한 거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늘에 걸린 무지개 너머에 있는 것도 아니고, 오직 걱정과 한숨과 웃음과 눈물과 고뇌로 얼룩진 우리들 나날의 삶, 나 자신의 삶 속에 있는 것이다.
삶의 글은 삶의 말로 써야 한다. 삶의 말은 나날이 쓰는 정다운 우리들의 말, 나 자신의 말이다. 빌려온 말, 유식을 자랑하는 말, 남의 말이 아닌 쉬운 우리 말이다. 사실을 보여주는 말, 진실을 느끼게 하는 말, 가슴에 바로 와 닿는 말이다.
글쓰기를 할 때 아이들에게 편하게 ‘생각’을 쓰라고 강조해서는 결코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없다. ‘생각’보다도 ‘행위’요 ‘행동’이다. 언제, 어디서, 누구하고, 무슨 일을, 어떻게 하였다는 ‘서사문’ 쓰기가 중요한 까닭이 이렇다. 바로 자기가 한 일을 쓰게 되면 거기서는 남의 글이나 말을 흉내낼 필요가 없게 되고, 도리어 그런 흉내는 방해만 된다. 정직한 글, 살아 있는 글은 이렇게 해서 나온다.
“제발 아이들같이, 초등학생 같이 써보세요. 초등학생들만큼 쉽게 쓰면 됩니다. 결코 어렵게 써서는 안 됩니다. 대학 교수들이 쓰는 논문같이 써서는 안 됩니다. 그게 거의 모두 엉터리 글입니다. 초등학생들이 쓰고 있는 글. 그 글이 가장 깨끗한 우리 말로 된 글입니다. 선생님들은 학생들한테 배워야 합니다. 그 많은 학생들에게 배울 수 있는 선생님들은 참으로 행복합니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한다 1995년
일하는 사람은 밥을 먹지 말라는 말이 있다. 나는 일하지 않는 사람은 글도 쓰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방안에 앉아 밤낮 글만 쓰고 있는 사람이 쓴 글이 무엇을 얘기하고 무엇을 보여주겠는가? 지금 우리 사회는 온갖 글이 온갖 인쇄물에 실려나와 엄청난 글 공해를 일으키고 있다. 정작 말을 하고 글을 써야 할 사람들은 일만 하다 보니 쓸 틈도 없고, 또 스스로 무식하다는 열등감에 빠져 글을 못 쓴다. 이래서 사회가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일하는 사람들이 쓴 이런 이야기 글이 문학이라고 쓴 작품보다 더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신춘문예보다 노동자나 일하는 어머니들이 쓴 살아온 이야기가 훨씬 더 감동을 주고 재미있게 읽히기 때문이다.
우리 문장 쓰기 1992년
진리를 얻기 위해서라면 글에 파묻힐 것이 아니라 글을 좀 멀리 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글이 없어서 진리를 잃고 세상이 이 지경으로 된 것이 아니다. 일하기 싫어서, 자기만 편안하게 살고 싶어서, 남이 한 일의 결과를 앉아서 얻어가지고 싶어하니까 이렇게 되었다. 일은 안하고 교과서와 책만 들여다보고 시험점수만 따내는 것을 공부라고 가르치고 길들였기 때문에 진리는 간곳 없고 거짓과 속임수가 판치는 세상이 된 것이다.
사람은 글을 쓰지 않을 수 없어서 쓰는 것이다. 돈벌이로 글을 파는 사람도 많겠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어쩔 수 없는 자기표현으로 글을 쓴다. 책이 책방에 산으로 쌓이고 거리에 넘치더라도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역시 글을 써야 한다. 그것이 우리의 생명을 이어가는 길이기 떄문이다.
대상을 자세하고 정확하게 알리는 것, 이것이 글쓰기의 바른 글이다. 소설이든 동화든 수필이든 생활문이든 편지글이든 아이들의 글이든 다 그러하다. 옛날의 글이고 오늘의 글이고, 동양의 글이고 서양의 글이고 이 점에는 다름이 없다.
글의 마지막 심판자는 백성들이다. 책과 학문과 추상논리와 관념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아니라 사물과 사실 속에서 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지닌 가장 소박한 느낌과 생각이 글의 가치를 매기게 되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거의 모두 걸려 있는 정신병이 있는데, 그것이 ‘유식병’이다. 누구나 다 알고 있는 쉬운 말을 하면 무식한 사람이 된다. 그래서 될 수 있는 대로 남들이 잘 안 하는 말, 어려운 말, 유식한 말을 하고 싶어한다. ‘말을 한다’고 할 것도 ‘언어를 사용한다’고 … ‘우리 집은 산 밑에 있는데’할 것을 ‘산 밑에 위치해 있는데’ 한다. 누구를 만났다든지, 무슨 책을 읽었다든지, 무슨 소식을 들었다든지 하는 말은 모조리 ‘접한다’고 한다.
광고 한 줄, 표어 한 마디도 권위가 있어 보이는 말을 찾아 쓴다. … ‘언제나 차례를 지키는 생활을 합시다’고 하면 너무 말이 쉬워서 권위고 힘이고 없어 보인다. 그래서 ‘질서의식 생활화’ 같은 말을 거리마다 걸어놓는다. ‘길에 물건을 쌓아두면 안됩니다’고 쓰면 아무 힘도 없는 사람들이 하는 말 같지만 ‘노상적치물 철저단속기간’하면 권위와 힘을 가진 말이라 여긴다. … 백성들도 아주 길이 들어서 … 어려운 말을 써놓으면 근사하게 여겨서 그 앞에 머리를 숙이는 기분이 되거나 순종하는 몸가짐이 되지만, 아주 쉬운 말로 써놓으면 별 볼일 없는 사람, 아무 힘도 없는 사람이 하는 짓으로 알고 얕보고 멸시하는 경향까지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식민지 백성들의 종살이 본성이다. 글이 지배하는 역사가 우리의 생각과 삶을 이렇게 만들고 있다고 나는 본다.
서로 이야기하는 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너무 줄어들었다. 어떻게 되어가는 판인지 한쪽에서만 말한다. 모든 방송이 그렇고, 연설이고 웅변이란 말이 그렇고, 학교의 수업이 그렇고, 교회의 설교가 그렇다. 아이들은 말을, 주고받는 것으로 배우지 못하고 듣기만 하고 받아들이기만 하면서 배운다. 말은 배우는 과정부터가 ‘비인간화’되어 있다.
오늘날 글을 쓰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이다. … 삶을 찾아 가진다는 것은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아주 쉽게 말해서 방안에서 책만 들여다보고 문학이 어떠니 인생이 어떠니 하지 말고, 밖에 나가 좀 땀을 흘려 일을 하라는 것이다. 농사일이든 공장일이든, 하다못해 장사라도 좋다. 보통의 사람들이 누구나 다 하고 있는 일, 밥을 먹고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몸으로 해야만 글 한 줄을 쓰더라도 살아 있는 말이 나오고 살아 있는 이야기가 씌어진다.
어떤 문체가 자기한테 알맞는가 하여 그것을 본받거나 어떤 틀에 맞추듯이 글을 쓴다는 것은 어리석고 부질없는 일이다. … 무엇보다도 밖에서 들어온 남의 나라 말과 말법의 굴레에서 벗어나는 일이 가장 크고 급하다. 잃어버린 우리 말과 짓밟혀 있는 우리 말을 도로 찾아내고 주워올려 글에서 살려서 써야 제대로 우리 글이 된다.
가장 쓰고 싶은 글, 써야 할 글을 쓰라. 그러나 그것이 어디 그렇게 쉬운 일인가? … 자꾸 그 다음, 그 다음으로 내려가서는 안된다. 그것은 타락이다.
요즘 우리 나라 작가들이 쓸 거리를 찾아 비행기 타고 미국에도 가고 유럽에도 가고, 중국에도 가고 소련에도 가고 아프리카에도 가고 해서 부지런히 여행을 한다고 듣고 있다. … 다만 이 땅에는 쓸 얘기가 없어서 그렇게 비행기 타고 돌아다닌다면 분명히 문제가 있다고 말하고 싶다.
어쩌다가 신문사나 잡지사에 투고해 온 아이들의 글을 보면 제목이 ‘생일’이고 ‘소풍’이고 하는 따위다. 글이란 좀 별난 것, 남에게 자랑할 만한 것, 잘 먹고 잘 입고 기분좋게 놀았다는 것 — 이런것이라야 글이 된다고 생각하는 아이들이 대부분이다.
제발 멋을 부리지 말라. 이 ‘멋’이라는 것, 제멋대로 쓴다는 것이 글자뿐 아니고 글을 망치고 문학을 망친다.
글을 쓸 때는 아주 결심을 단단히 해서 커다란 자기혁명을 한다는 몸가짐을 가져야 한다. … 우리 글을 쓰려고 하는 사람이 반드시 지녀야 할 가장 귀한 몸가짐, 마음가짐이 다음 세 가지다. ㄱ. 입으로 말하듯이 쓴다. ㄴ. 될 수 있는 대로 아이들도 알 수 있는 말로 쓴다. ㄷ. 글을 모르는 할머니에게 들려 준다는 태도로 쓴다.
글을 소리내어 읽어보는 것도 좋다. 눈으로 읽는 글보다 입으로 소리내어 릭어서 귀로 듣는 말로 제대로 되어 있을 때 비로소 그 글이 살아 있는 글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어떤 사람도 완전한 글을 쓰지 못한다. 그러면 그럴수록 남의 글을 고치려 할 것이 아니라 그대로, 온전치 못한 그대로 두어야 한다. 또 사람은 누구나 자기만 가진 말 버릇이 있고 글 버릇이 있다. 그것을 인정해야 한다. 남의 말 버릇, 남의 글 버릇을 모조리 자기 버릇대로 뜯어고치려 한다면 어찌되겠는가? 이게 바로 야만이다.
아이들에게 배워야 한다
나라 사랑이나 겨레 사랑이 그런 점수따기 지식 암기로 어떻게 생겨날 수 있겠는가? 아침마다 애국가 부른다고, 국기를 올리면서 가슴에 손을 얹는다고 나라 사랑하는 마음이 생겨날까? 결코 생겨날 수 없다고 나는 잘라 말하겠다. 언제나 방에 가두어 놓고 서로 남을 미워하게 하고, 서로 위에 올라가려고 남을 깎아내라고 짓밟고 해치면서 지옥 같은 지긋지긋한 낮과 밤을 보내도록 한 그런 학교와 집과 고향과 나라를 어떻게 사랑하겠는가? 그러다가 정작 나라 위해 국방의 의무를 체험하게 하는 군대에 가면 거기서는 온갖 무서운 기합을 받아야 하는 나라, 이런 나라를 어떻게 사랑할 수 있는가?
이 참된 사랑을 모든 사람이 갖도록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 길도 아주 훤하다. 어릴 때부터 산과 들에서 즐겁게 뛰놀면서 살게 하는 것이다. 자연 속에서 뛰놀면서 살아가는 것이 공부가 되게 하는 교육이다. 그렇게 해야 내 고향 내 나라 내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이 온몸에 배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다른 어떤 애국애족 교육도 다 헛되고 거짓인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학교생활이고 가정생활을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즐겁게 하는 삶’으로 보내게 된다면 학교를 졸업한 다음 어른이 되어도 그대로 살아갈 것이니, 정치고 경제고 산업이고 사회의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다. 문학과 예술도 비로소 삶과 하나가 될 수밖에 없고, 사람을 짓누르고 아이들을 괴롭히던 글도 살아 있는 말을 적는 글이 될 것이 틀림없다. 이래서 땅은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나라가 된다.
빛과 노래
한 달 동안 병원에서
밤낮 노래를 들었다
며칠 뒤에는 고든박골 병실로 옮겨
햇빛 환한 침대에 누워
새소리 바람소리 벌레소리 듣는다
아, 내가 머지 않아 돌아갈 내 본향
아버지 어머니가 기다리는 곳
내 어릴 적 동무들 자라나서 사귄 벗들
모두모두 기다리는 그곳
빛과 노래 가득한 그곳
그러고 보니 나는 벌써
그곳에 와 있는 것 아닌가
고곳에 반쯤 온 것 아닌가
나는 가네 빛을 보고 노래에 실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