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석

미국의 도시들

미국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시애틀, 미네소타, 내쉬빌, 뉴욕, 덴버, 포틀랜드. 동서남북 멀찌감치 떨어진 6개 도시에 총 4주간 머무는 동안 파타고니아 광고에 나올 법한 대자연을 봤고, 입안에 온갖 음식을 집어넣었으며, 오래된 친구를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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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unt Rainier National Park

우리만 우산 쓰고 있네

시애틀 사람은 비가 쏟아져도 우산을 쓰지 않는다. 방수 잘 되는 레인 재킷을 입고 관광객이 펼친 우산들 사이를 비집고 지나가야만 진정한 로컬이기 때문이다.

우리처럼 멀리서 온 사람과 대화는 언제나 날씨로 시작한다. “오늘 날씨가 안 좋아서 어떡해. 근데 이번 주 내내 비 올 거야. 웰컴투 시애틀.“이라는 말에는 ‘언제나 비 오는 도시’에 살고 있다는 이상한 자부심이 숨겨져 있다.

제프 베조스의 향기

아마존 고, 아마존 포스타, 아마존 북스토어. 아마존 본사가 자리 잡은 지역답게 어디를 가도 아마존 로고가 a부터 z까지 웃고 있다. 공항에 아마존 직원 전용 체크인 데스크가 따로 있을 정도니 뭐.

수원하면 삼성, 시애틀하면 아마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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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 Anthony Falls

살기 좋은 곳

미네소타에서 만난 오랜 친구들은 이사를 고민하거나 준비하고 있었다. 영하 2~30도까지 떨어지는 겨울도 문제지만 대도시로 넘어가야 더 많은 기회가 있다고 믿기 떄문이다.

여기서 ‘기회’는 더 이상 직장이 아니다. 어차피 집으로 출근하는 시기에 ‘더 많은 기회’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람, 음식, 날씨를 경험할 거라는 기대와 같다.

‘미네소타가 살기에는 괜찮지’라는 말을 하며 고개를 끄덕이지만 하나둘씩 새로운 환경을 찾아 떠나간다. 왠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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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elby Bottoms

신비로울 정도로 친절한 사람들

내쉬빌 교외에서 트루먼처럼 걷다 보면 처음 보는 사람들이 방긋 웃으며 인사한다. 누가 봐도 관광객 2명이지만 오래된 이웃처럼 안부를 물어 봐주는 친절한 동네다.

우버 드라이버는 뒷좌석에 직접 쓴 관광 가이드를 붙여놓고, 현지인들은 ‘웰컴투 내쉬빌’을 외칠 준비가 되어 있다. “내 사촌이 평창 올림픽에 갔었지.” “내 아들이 일본은 가봤는데 말이야.” 마법 같이 눈앞의 한국인과 연관성을 찾아낸다.

저기 보이는 저 동네? 3년 전에는 없었어

내쉬빌 다운타운을 둘러보면 타워크레인이 수십 개는 되어 보인다. 인구는 늘고, 집값은 오르고, 경제는 좋다. 그놈의 아마존은 여기에도 연구 센터를 짓고 있고, 발코니 달린 아파트에 사는 부자는 강아지와 조깅에 나선다.

우버 드라이버는 다운타운을 지날 때마다 ‘저기? 3년 전에는 없었어’라 알려준다. 제주도 사람이 새로 생긴 동네를 지날 때 ‘원래 여기 진짜 아무것도 없었어’라고 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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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rand Book Store

화장실을 찾아라

뉴욕에 왔으니 내쉬빌에서 받았던 환대는 기억에서 지워야 한다. 각자 살길을 찾기도 바쁜 곳에서 사람들이 나에게 관심이 있을 리가 없다.

뉴욕 관광 팁. 타임스퀘어나 센트럴파크가 목적지라면 숙소를 떠나기 전 화장실부터 가야 한다. 안 마려워도 일단 속을 비워내는 게 프로다. 뉴욕에서 신호를 지키는 행인만큼 찾기 힘든 것이 공중화장실이기 때문이다.

쇼핑몰, 식당, 카페. 어디를 가도 화장실은 가장 은밀한 곳에 숨겨져 있다. 돈을 내지 않는다면 화장실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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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arden of the Gods

여기 고도가 어떻게 되나요

해발 1,600m에 위치한 ‘Mile-High City’ 덴버만큼 높이에 진심인 도시는 없다.

아무 산이나 오르면 대충 고도가 2,000m는 넘고, 차를 타고 유명한 산에 오르면 ‘여기가 해발 3,500m입니다’ 알려주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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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nnon Beach

2년 전까지만 해도

‘2년 전까지만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어.’

우버 드라이버 무하마드는 8년간 포틀랜드 생활을 마무리하고 뉴욕으로 이사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유는 다양했다. 노숙자 텐트촌, 과격한 시위, 오르는 집값, 심각한 범죄율. 새해를 맞이하고 일주일 만에 총격 사건이 3번이나 있었던지라 어쩌면 당연했다.

다음날 다운타운에서 커피를 마시는데 현지인 아저씨가 다가와 인사를 하더니 신세 한탄을 하기 시작했다. “포틀랜드 처음이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렇게 망가지지 않았는데. 버스 탈 때마다 총 맞을까 무서워한다니까. 경제도 너무 안 좋아. 포틀랜드는 망했어.”

마지막 말이 여행 내내 떠올랐다.

“Portland is doomed.” “Portland is doom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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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urier Coffee

힙스터 도시

‘Keep Portland Weird’라는 슬로건은 아직 유효하다.

가지 말아야 할 지역만 피하면 그 어디보다 힙한 도시. 허름한 슈퍼마켓도 유기농 콤부차와 수제 맥주를 판다. 푸드카트에서 파는 태국 음식은 ‘미쳤다’ 소리 날 정도로 맛있고, 로컬 카페는 오트, 아몬드, 발리 우유로도 완벽한 코르타도를 만들어준다.

“Portland is not doomed.” 관광객이 본 포틀랜드는 아직 망하지 않았다.

매일을 여행자처럼

돌이켜보면 여행하는 강민석은 사명감에 차 있었다. ‘오늘 하루도 최대한 많이 보고, 먹고, 웃어야 한다’는 기본 설정 덕분에 4주를 알차게 보낼 수 있었다.

이 바람직한 마음을 집에서도 가지고 싶다. 눈을 뜨자마자 하고 싶은 일을 떠올리고, 자기 전에는 이곳을 곧 떠날 것처럼 아쉬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