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선봉에 세우는 삶
나는 어려운 시절이 오면, 어느 한적한 곳에 가서 문을 닫아걸고 죽음에 대해 생각하곤 했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나면, 불안하던 삶이 오히려 견고해지는 것을 느꼈다. 지금도 삶의 기반이 되어주는 것은 바로 그 감각이다. 삶으로부터 상처받을 때 그 시간을 생각하고 스스로에게 말을 건넨다. 나는 이미 죽었기 때문에 어떻게든 버티고 살아갈 수 있다고.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김영민
고대인은 불명예스러운 죽음을 가장 두려워했지만, 현대인은 죽음 그 자체를 가장 두려워한다. The Bed of Procrustes Nassim Nicholas Taleb
헛짓거리는 거침없이 치워내자. 중요한 일을 하는 데 주저하지 않고, 가지고 있는 시간을 음미하자. 삶이 짧다면 당신이 해야 할 일이다. Life is Short Paul Graham
우리에게 짧은 삶이 주어진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을 짧게 만드는 것이다. Lucius Annaeus Seneca
삶을 당장 떠날 수도 있다는 사실이 무엇을 말하고 생각할지 결정하게 해야 한다. Marcus Aurelius
스토아 철학(Stoicism)이 꽤 인기다. 마르쿠스나 세네카의 작품이 베스트 셀러가 되고 이들의 철학을 통해 사고한다는 팀 페리스나 나발 라비칸트는 영향력을 넓혀간다.
스토아 철학은 왜 중요할까?
“Memonto Mori 죽음을 기억하라”로 유명한 스토아 철학은 죽음을 중심으로 명확한 사고를 키우게 돕는다. ‘죽음은 언제나 곁에 있다’는 절대적 사실만 기억한다면 관계, 커리어, 행복을 위해 낭비는 최소화하고 내면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당연하게도 언제 죽을지 모른다면 싫어하는 사람이나 답답한 회사에 투자할 여유 따위는 없어진다.
‘현실적 선택을 해야 한다’는 조언에 이끌려 원하지 않는 공무원 시험을 보거나 받아주는 회사에 입사할 수 있다. 하지만 높은 월급을 받아 더 비싼 물건을 사고 더 넓은 집으로 이사하여 12가지 비타민을 먹는다고 해도 죽음은 떠나지 않는다. 삼성병원 VVIP 1인실에서 죽으면 더 고귀하다며 박수갈채를 받는 것 또한 아니다. 사회적 지위가 아닌 죽음이야말로 ‘현실적 선택’을 위한 중심축이 되어야 하는 이유다.
종교, 국적, 성격이 달라도 죽음은 결국 모두에게 적용된다. 또한 언제 찾아올지 아무도 모르기에 예측과 두려움은 불필요해진다. 갑옷을 입고 사주경계를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스토아 철학이 말하듯 죽음을 뒤로 숨기는 대신 선봉에 세우면 두려움이 아닌 영감과 기운을 얻고 현재에 집중할 수 있다.
2021년형 인간은 매 순간 여러 선택지 사이에서 고민한다. 영화 한 편을 보고자 넷플릭스와 왓챠를 뒤지며 30분을 허비하는 게 일상이다. 변기에 앉아 인스타그램을 확인하고 ‘인성 논란’ 뉴스를 보며 온종일 화를 삼키기도 한다. 컴퓨팅 속도로 쏟아지는 정보에 익숙해진 뇌는 고요한 정적에 참을 수 없는 불안감을 내뿜는다.
순간적인 자극에 중독되어 자기 자신을 통제하지 못하는 인간에게 스토아 철학은 적절한 처방이 된다. 지위나 명예를 위한 다툼, 질투, 욕심은 무의미하게 되고 불량한 정보를 구별하여 의미 있는 시간을 만드는 데 집중하게 만든다. ‘좋아요’나 ‘팔로워’가 아무리 많아도 죽음 앞에서는 의미를 잃기 마련이다.
게다가 스토아 철학은 ‘소비자’를 ‘행동가’로 만드는 힘이 있다. 인터넷은 기관/기업/정부의 간섭없이도 자아실현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진정한 자유와 의미를 추구한다면 누구나 코드나 미디어를 통해 크게 성장할 수 있는 시대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외부 소음 대신 내면의 목소리를 들으려 한다면 ‘죽음을 기억하라’는 문장은 강력한 무기가 된다.
기술이 이루어낸 편리함은 인간 내면의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고 오히려 악화시키고 있다. 8살 아이가 스마트폰 없이는 밥을 못 먹는 오늘 1,800년 묵은 가르침이 주목 받는 건 어쩌면 당연한 현상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