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주세요
나-이야기-무대에서 쓴 독백 대본입니다.
암전. 아이폰 기본 벨소리가 5초간 울린다. 민석은 전화를 받는다. 전화기 너머로 신재의 목소리가 들린다.
민석아, 아빠는 가족들한테 짐밖에 안 되는 것 같다. 이럴 바에는 아빠가 사라지는 것이 좋겠지?
노란 조명 아래. 민석은 핸드폰을 들고 서 있다. 전화하는 것이 귀찮은 듯 허공을 바라보며 헛발질한다.
여보세요? 아빠가 그렇게 얘기하면 어떡해요. 가족들 다 아빠 걱정만 하고 있는데. 의사도 그랬잖아. 다 나을 수 있다니까. 조금씩 좋아지고 있잖아요. 알았어요. 또 전화할게요.
민석은 전화를 끊는다. 그때 삑, 삑, 삑. 기계 소리가 들린다. 민석은 머리를 긁적인다. 뭐지? 싶은 표정이다. 소리는 점점 커진다. 민석은 크게 한숨을 쉰다.
뭐야… 이게 무슨 소리지?
모든 조명이 꺼진다.
하얀 조명이 켜진다. 눈이 부실 정도로 밝다. 병실 침대가 있다. 민석은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는 간병사에게 말을 건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식사하셨어요? 오늘 아빠는 좀 어떤가요? 아… 호흡이요… 또 호흡이 문제네. 그래서 의사는 별말 없었나요? 네… 알겠습니다. 선생님은 식사하셨다고 했죠? 네 저는 뭐, 집에서 먹고 왔죠.
그나저나 아빠가 걱정이에요. 이 법이 진짜 말이 안 되지 않아요? 다른 병원들도 이렇게 하나요? 아니, 사람이 지금 의식이 거의 없는데, 다른 병원으로 쫓아낸다는 것이 말이 안 돼요. 다음 주면 요양병원이든 호스피스든 어디로든 가야 하는데. 이 상태로 어딜 가요 진짜… 선생님, 바깥 공기라도 좀 쐬고 오세요. 오늘 날씨 좋더라고요. 걱정 마시고 다녀오세요.
민석은 멀리서 신재를 멍하니 쳐다본다. 눈물이 날 것 같다. 천천히 걸어가서 의자에 앉는다. 머리 위 핑크색 조명이 켜진다. 민석은 신재를 쳐다보며 말한다.
아빠의 눈동자는 노랗다. 근육은 사라진 지 오래다. 헐어 버린 입안에서는 연고 냄새가 난다. 어디에서도 맡지 못했던 달달한 연고 냄새가 내 콧속을 찌른다. 아빠는 아무것도 먹지 못한다. 말하지 못하고, 걷지 못하고, 변을 가리지 못한다.
인간은 결국 갓 태어난 아기가 되어 죽는 걸까?
아빠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니, 생각을 할 수나 있을까. 아빠의 혈관은 마약성 진통제로 가득 차 있다. 척추에 자리 잡았던 8센치짜리 종양은 잘려 나갔지만, 수술 때문에 생긴 등 뒤 커다란 상처는 아직 그대로 벌어져 있다.
간호사가 아빠의 등을 소독할 때면, 상처 속을 보고 싶지 않아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야만 현실을 부정할 수 있었으니까. 그래야만 내가 살 수 있었으니까.
아빠의 등을 도려낸 의사는 말했다. “종양은 잘 제거됐습니다. 한 달 뒤면 걸어 다니실 거예요.” 난 그 로봇 같은 의사의 말을 믿었다. 멍청했고 또 안일했다.
조명이 꺼진다. 어둠 속에서 기계 소리가 나기 시작한다. 삑, 삑, 삑. 소리는 작게 또 천천히 들린다. 어둠 속에서 민석이 말한다.
아침이다. 간호사는 아빠의 손가락에 산소 측정기가 제대로 연결되었는지 확인한다. 그러고선 고개를 갸우뚱한다. 기계를 다시 한번 뚫어져라 보더니 급하게 뛰어나간다. 잠시 후 의사와 간호사들이 밀려 들어온다. 내 심장은 터질 것 같다. 그때 의사가 말한다. “아드님, 잠깐 이야기 나눌 수 있을까요?”
의사가 나를 바라본다. 그리고 엄마에게 얼른 전화하라고 말한다. 의사는 주사기로 알 수 없는 약을 집어넣고 있다. “어머님 오실 때까지만이라도 버티실 수 있게요.” 옆에 있는 간호사는 말한다. “어머니는 오고 있대요? 어디쯤 계시는데요?”
삑, 삑, 삑, 삐––
그렇게 아빠는 죽었다. 의사가 사망선고를 하고 나서야 아빠와 나. 단둘이 방 안에 남았다. 조용하다. 아빠는 입을 벌리고 있다. 영혼이 입 밖으로 날아가 버렸나 보다. 간호사가 다시 돌아와 아빠의 입에 산소마스크를 씌운다. 그래야 산 사람들이 놀라지 않으니까. 그렇게 아빠는 죽어서도 환자로 남는다.
웅성웅성 소리가 들린다. 민석 위로 노란 조명 하나가 켜진다.
신재는 듣고 있었다. 본인이 조만간 다른 병원으로 가야 한다는 것을. 상식에 어긋난 법 때문에 아들이 걱정하고 있다는 것을.
신재는 더 이상 치료로 몸과 정신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아들은 왜 의사와 간호사를 막지 못했을까? 왜 모든 걸 그들에게 맡겼을까?
신재는 슬펐다. 그리고 죽음을 선택했다.
노란색 조명 3개가 다시 켜진다. 삑, 삑, 삑. 기계 소리가 다시 나기 시작한다.
뭐지… 꿈인가? 어.. 아빠…?
건너편 침대에 아빠가 있는 걸 확인한다. 뛰어가려고 하는데, 의사와 간호사가 들어온다. 민석은 흥분해서 침대를 막아서고 화를 낸다.
아니 저기요! 교수님! 간호사님! 다들 나가주세요! 아니, 사람이 죽어가는데 마지막까지 약을 처넣는 것이 말이 됩니까? 저기요! 저기요! 나가라고! 나가!
민석은 고민에 빠진다. 이게 아닌데 싶은 표정이다. 안 되겠어. 감정을 빼고, 조금 더 차분하게 해 보자.
선생님. 마지막 남은 시간을 단둘이 보내고 싶습니다. 네, 다들 나가주세요. 주사기 내려놓으시고요. 인간 강신재의 존엄성을 다 같이 지켜 냅시다. 선생님들 마음은 이해합니다. 그래도요. 환자를 질병이 아닌 사람으로 바라봅시다. 다들 심호흡하세요. 자, 생각해 봅시다.
민석은 고민에 빠진다. 이것도 아닌데 싶은 표정이다.
너무 길어… 주저리주저리… 그래, 짧으면서도 단호하게 말해 보는 거야.
여기 계신 분들. 지금 다 나가주세요. 저와 아빠 단둘이 있고 싶습니다. 간호사님. 우리 엄마 번호 알잖아요. 전화해 주세요. 부탁합니다. 나가주세요.
민석은 아빠의 침대로 다가간다. 의자에 앉는다. 그리고 손을 잡는다.
다들 나갔어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아빠 고생했어요. 내가 많이 미안했어요. 아빠는 짐이 아니에요. 아빠는 잘못이 없어요. 고마워요. 고마워요.
민석은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린다.
맞아 이랬어야 했어. 맞아…
모든 조명이 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