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특별한 순간에 살고 있다
지식
과학이란 자신을 속이지 않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Richard Feynman
물리학자 데이비드 도이치에 따르면 약 10만 년 간 현대 인류는 별다른 발전을 이루어내지 못했다. 매일 아침 햇빛을 받아도 태양이 어떻게 에너지를 방출하는지 알지 못했고 계절이 바뀌어도 지구가 기울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언제부터 발전하기 시작했을까? 도이치는 _좋은 설명_이 발생하기 시작한 17~18세기 유럽 계몽기를 지식 발전의 시작점이라 말한다. 그리고 이 주장을 이해하려면 도이치가 정의한 좋은 설명(good explanation)과 나쁜 설명(bad explanation)을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계절 변화를 두 가지 가설로 설명할 수 있다.
좋은 설명 ⇒ 지구는 자전축이 기울어진 상태로 자전하며 태양 주위를 공전하기 때문에 계절이 생긴다.
나쁜 설명 ⇒ 전능한 신이 행복하면 따뜻해지고 슬퍼하면 추워진다.
여기서 두 설명 모두 검증은 가능하지만, 오직 좋은 설명만이 검증할 가치를 가진다. 결국 좋은 설명만이 비평, 실험, 증명을 거쳐 쉽게 변화하지 않는 ‘튼튼한’ 지식이 되고, 자전과 공전은 계절에 빼놓을 수 없는 요소로 자리 잡는다.
반대로 나쁜 설명은 상황에 맞춰 손쉽게 변화한다. 하와이와 서울이 경험하는 사계절이 다르다는 사실이 발견되어도 가설에 허구를 추가하면 되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나쁜 설명이 권력을 잡은 사회라면 침체 상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14억 년 역사 속에 인간이 좋은 설명에 집중한 시간은 고작 300년이다. 하지만 이토록 짧아 보이는 기간을 들여다보면 전구, 증기 기관, 자동차, 비행기, 반도체, 우주선, 인터넷, 스마트폰까지 폭발적인 발전을 이루어낸 것을 알 수 있다.
이제 인간은 지구에서 “무한한 발전”을 이루어내고 있다.
발전
모든 발전은 단 한 가지 활동 즉 좋은 설명을 위한 탐구가 이루어낸 결과다. David Deutsch
도이치가 말하듯 “뇌는 DNA보다 더 많은 정보를 수용한다.” 비둘기는 교육 없이도 잘 날지만 인간과 같이 지적인 대화를 나누지 못한다. 하지만 지적 능력이 중요하다고 해서 이성적 판단만이 발전에 기여한다는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다.
나심 탈레브는 메소 아메리카 사람들이 동그란 바퀴를 발명한 이후 바퀴 달린 가방이 탄생하기까지 6,000년이 걸렸다는 사실을 예시로 “정답이 단순하고 뻔할수록 발견하기 어렵다”고 주장한다.
이론과 토론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테플론, 케블러, 전구, 그리고 포스트잇 모두 예측하지 못한 실수 혹은 시행착오로 인해 만들어졌다. 작가 매트 리들리가 말하듯 발전은 자유로운 환경 속 점진적인 시행착오를 거쳐 발생한다.
시도
리들리가 예시로 드는 토마스 에디슨과 원자력 발전소 사례는 과감한 시도와 수정이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걸 보여준다.
에디슨은 적합한 필라멘트를 찾기 위해 6,000가지 식물성 소재를 실험에 사용했고, 결국 일본산 대나무로 원하던 전구를 완성했다. 그리고 200명 이상의 과학자와 기능사로 구성된 팀을 꾸려 50,000번의 실험을 거친 후 니켈-철 배터리를 만들어냈다. 결국 에디슨은 6년간 약 400개의 특허를 등록했다.
반대로 기술적 결함이 초래한 체르노빌 그리고 후쿠시마 참사 이후 원자력은 전 세계적인 규제 대상이 되어 별다른 발전을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 통계적으로만 보자면 원자력은 석탄, 바이오 에너지, 석유, 심지어 태양열보다 안전한데도 말이다. 게다가 원자력 기술이 정체 됨으로써 또 다른 참사가 일어날 확률은 더 높아진다.
반대로 자유로운 시도와 실패를 권장하는 구글의 자회사 ‘X’ 같은 경우 구글 글래스와 같이 틀에서 벗어난 상품을 내놓는다. 또한 개선을 위한 실수를 존중하는 조직이기에 새로운 도전이 대중의 외면을 받아도 실패로만 보지는 않는다.
인터넷
네트워크 가치가 사용자 수 제곱에 비례한다는 멧칼프 법칙에 따라 인터넷 발전 속도는 서서히 느려질 것이다. 대부분 사람은 서로에게 딱히 해줄 말이 없다! 2005년쯤 인터넷이 팩스 정도 영향력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Paul Krugman 1998년
인터넷이 발전하기 시작할 때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크루그먼은 인터넷만큼 자유로운 환경이 없다는 걸 간과했다. (뒤늦은 깨달음이지만) 최소한 비용으로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는 환경에서 수많은 ‘에디슨’이 탄생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로 보인다.
원래 트위터 창업자들은 팟캐스트 서비스를 만드는 것이 목표였고 쿠팡은 그루폰과 같은 쿠폰 기반 소셜커머스로 시작했다. 만약 이 두 회사가 인터넷과 다르게 자유롭지 않은 환경을 기반으로 시작했다면? 성과는 분명 달랐을 것이다.
영감
그림 그리는 화가는 진정한 계승자다. 우리는 램브란트, 벨라스케스, 세잔, 마티스를 잇는다. 화가에게는 언제나 아버지와 어머니가 있다. 우리는 아무런 배경 없이 나타날 수 없다. Pablo Picasso
과학적 지식과 같이 예술적 가치 또한 지적 교류를 통해 발전한다. 파블로 피카소는 2~3년 간격으로 새로운 영향을 받아들여 자신의 작품에 적용했다. 그리고 100년이 지나도 피카소의 작품은 또 다른 예술가를 위한 영감이 된다.
음악에서도 비슷한 예시를 찾아볼 수 있다. 음원 일부를 편집하여 끼워 넣는 기법인 샘플링은 지난 3~40년간 힙합뿐 아니라 음악 대부분 장르에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프로듀서 마크 론슨은 “샘플링은 자신을 음악적 서사에 집어넣고 이야기를 이끄는 방법”이라 말한다. 단순한 모방을 넘어서 소리를 자르고 변형하여 자기 것으로 만드는 아티스트들은 다른 음악에서 받은 영감을 기반으로 독창성을 창조하는 것이다.
만약 샘플링이 없었다면 프랭크 오션, 카니예 웨스트, 다프트 펑크 또한 없다.
예술에서 영감이 어디서 시작하고 끝나는지는 알 수 없다. 예를 들어 봉준호는 클루조와 샤브롤, 클루조는 멀나우와 랑, 멀나우는 셰익스피어, 셰익스피어는 초서에 영감을 받았다. 예술적 발전에 정해진 정답은 없지만, 교류가 창의적인 결과를 낳는다는 건 분명해 보인다.
문제
문제 해결은 새로운 문제를 만든다. Karl Popper
도이치는 인간의 발전이 무한할 것이라 믿으며 리들리는 혁신은 멈추지 않을 거라 말한다. 하지만 지적 자산이 소수에게 집중되는 영역은 예측 불가능한 위기에 취약하다.
예를 들어 반도체 시장에서 압도적인 성과를 내는 TSMC를 보면 알 수 있다. TSMC는 애플, 퀄컴, 엔비디아와 같은 기업과 계약하는 반도체 위탁 생산 회사이며 전 세계 반도체 시장 50% 이상을 점유하고 있는 사실상 독점 회사다.
여러 전문가는 TSMC가 반도체 영역에서 수십 년간 쌓아온 기술은 그 어떤 조직도 자금과 시간으로 따라갈 수 없을 만큼 독보적이라 말한다. 물론 TSMC는 성공을 누릴 자격이 있지만 TSMC가 정치적 요소 특히 미-중 사이 갈등에 영향을 받는 대만을 기반으로 한다는 부분은 불안 요소로 고려되기도 한다.
발전하는 삶
우주는 우리를 압도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는 우리의 집이고 자원이다. David Deutsch
“지구는 그저 공전하는 별 하나이고 은하는 별 수천억 개를 가지고 있으며 우주는 또 수천억 개 은하를 가지고 있다.”
이런 말을 들으면 우주 멀리까지 날아가 지구를 바라보는 상상을 해본다. 끝없이 팽창하는 우주 속에 나 같은 존재가 무슨 의미를 가질까 고민하면서도 인간이 어떻게 보이지 않는 진실을 밝혀내고 있는지 신기하기도 하다.
지식 또한 무한할 수 있다면 인류는 또 다른 빅뱅을 이제야 경험했다. 생명이 태어날 수 있는 별에서 운 좋게 태어난 인간에게 발전은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역사가 말하듯 자유로운 환경에서 좋은 설명을 추구한다면 나도 조금씩 성장하여 누군가의 영감이 될 수 있을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