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석

밑줄 모음 - 동양철학 에세이

책 머리

도사란 끊임없이 머리 속으로 생각하면서 옳은 길을 찾아 실천하는 사람을 뜻합니다.

동양에서 도를 깨우치는 데 필요한 것은 지혜가 아니라 수양을 통한 덕이었습니다. 따라서 지혜로운 사람보다 어진 사람을 높였던 것입니다.

우리 선조들은 24절기를 모르면 ‘철부지’라고 했습니다. … 우리들 중에도 철부지가 많을 것 같습니다. 우리는 쌀밥을 먹으면서도 벼를 만져 볼 기회가 적습니다. 지금 농촌에서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잘 모릅니다.

철학은 현실 인식에서 출발합니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와 현실을 인식하고 그 토대 위에서 어떻게 살 것이며,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문제 삼는 것은 동양 철학이라고 해서 특별히 다를 것이 없습니다.

우리는 동양 철학을 과거의 철학 또는 골동품이라고 생각하지 않으며, 동시에 과거의 철학에 이 시대의 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동양 철학을 알지 못하고 감성적으로 거부하는 태도를 비판하며, 동시에 동양 철학을 영원한 우주적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도 비판합니다. … 우리가 함께 살고 있는 이 공간, 이 세상을 좀 더 살 만한 곳으로 바꿔 보려는 사람들이 정신을 단련하고, 주변 사람들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재료를 제공하려는 것입니다.

공자

공자가 주의를 기울였던 문제는 사람의 삶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공자가 얻은 해답이 인이었던 것입니다. … 인을 ‘어질다’로 풀어서는 의미가 제대로 살지 않습니다. 인은 ‘사람다움’이라고 풀어야 합니다. 공자의 관심은 어떻게 사는 것이 사람다움을 실현하는 길인가에 있었던 것입니다.

논어에서는 군자와 소인을 여러 곳에서 대비시키고 있습니다. 소인은 이로우냐 해로우냐를 따지는 데 밝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군자는 옳으냐 그르냐를 따지는 데 밝은 사람입니다. … 소인은 남들과 같아지기는 잘하지만, 남들과 어울리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군자는 남들과 잘 어울리되 같아지지는 않습니다. 남과 같다면 자신의 존재 의미는 없습니다. 자신이 참다운 가치가 있다면, 자신의 역할을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야 합니다.

본래 군자는 다스리는 계층, 즉 군주의 자식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지배 계층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공자는 군자의 의미를 지배 계층이 아니라 덕을 쌓은 사람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사람다운 사람의 용기는 참용기입니다. … 사람다운 사람은 정말 그 일로 해서 피해를 입거나 또는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하더라도, 아니라고 해야 할 자리이면 아니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비겁한 사람은 일생 동안 두고두고 죽습니다. 그가 사람답기를 포기할 때마다 그의 존재 의미는 없는 것이며 따라서 죽은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이 중요하기 때문에 공자가 사람다움을 실천하는 일에서는 스승에게도 양보하지 말라고 했던 것입니다.

공자는 정치란 질서를 바로잡는 것이며, 그 질서는 위에서부터 아래로 내려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쓰는 말 가운데 선생님이라는 호칭만큼 좋은 말도 드뭅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교육자들의 권위가 땅에 떨어지면서 선생님이라는 호칭도 값이 내려갔습니다. 그래서 아무에게나 선생이라고 부르게끔 되었습니다. … 말의 인플레입니다. 호칭이 바르지 못하면 그런 호칭을 가진 사람의 말이 권위가 없어집니다.

“예로부터 사람은 누구나 죽는 법이지만 믿음이 없으면 아예 사회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다.”

노자

노자는 학자라는 자들이 학파를 만들고 서로 논쟁하는 것이 천하를 위하여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옳고 그름도 각기 달라 혼란만 더한다고 본 것입니다.

노자는 정치를 생선 굽는 일에 비유하여, 자꾸 이리저리 뒤적이면 생선이 다 부숴지고 타 버리는 것과 같이 정치가 백성들에게 끼어들수록 천하는 뒤죽박죽이 된다고 합니다.

“최고 수준의 통치자는 백성들이 그가 있다는 것만 알게 할 뿐이다. 그 다음 수준의 통치자는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고 칭송을 듣는다. 그 다음 수준은 백성들이 그를 두려워하고, 그 아래는 백성들이 그를 경멸한다.”

“최고의 덕을 가진 사람은 의식적으로 덕을 얻으려고 애쓰지 않는다. 그래서 덕이 완전하게 나타난다. 수준이 낮은 사람은 의식적으로 덕을 얻고자 하며, 또 그것을 잃지 않으려고 안달한다. 그래서 덕이 완전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최고의 선은 물과 같다. 물은 만물에게 큰 이익을 주면서도 자기를 주장하여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장소에 머무르고 있다. 그래서 도의 본래 모습에 가깝다.”

노자의 철학에서는 세상에서 추구하는 가치들이 모두 값진 것이 아닙니다. 명예나 권력이나 돈이나 모두 쓸데없는 것들입니다. 노자가 추구한 것은 공자처럼 도덕을 닦아 훌륭한 인격을 완성하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 인격도 남들의 입방아에 날리는 쭉정이 같은 것입니다. 노자가 보배라고 생각한 것은 기본적인 생명의 욕구, 자연스러운 생명 활동을 완전하게 실현하는 것이었습니다.

묵자

묵자가 주장한 것은 정치적 평등과 경제적 평등이었습니다. … 당시로 불 때 묵자의 주장은 가히 혁명적이었으며, 그는 민중의 편에 가장 가깝게 선 사상가였다고 하겠습니다.

“나는 사랑을 이용해서 남을 끌어들이고, 겸손을 이용해서 남을 막아냅니다. 사랑이 아니면 남들이 당신을 가까이하지 않고, 겸손이 아니면 남들이 당신에게 대들게 되지요.”

묵자는 맹자의 표현처럼 “머리부터 발꿈치까지 갈아 없어진다해도 그렇게 해서 세상에 이로울 수 있다면 하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실천해 나갔습니다.

묵자는 운명이란 포악한 임금이 만들어 낸 궁색한 자기 변명이며, 나아가 백성을 속이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 그는 당시 사람들이 가장 큰 운명이라고 생각했던 세습적 신분제에 반대했습니다. 지배층이 항상 귀한 것이 아니며 피지배층이 끝내 천한 것이 아니라고 하면서, 인재를 쓸 때 차별을 철폐하라고까지 주장하였습니다.

장자

사람이 마땅히 가야하는 길이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의 도리입니다. 요즈음은 인도보다 차도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사람이 갈 길에 차들이 점점 쳐들어와 인도가 차도가 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인도를 잃어 가고 있습니다.

“도는 빈 것이다. 그것은 무이다. 그러므로 만물을 낳고 포용할 수 있다. 만물 중 하나인 인간은 도를 따라야 한다. 도를 벗어나면 오직 스스로를 상할 뿐이다. 도를 따르지 않고 쓴 칼날이 무디어지듯이.”

“도는 말할 수도 없고, 볼 수도 없고, 만질 수도 없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유한하고, 알아야 할 것은 무한하다. 유한한 것으로 무한한 것을 좇는 일은 위태로울 뿐이다. 그럼에도 스스로 알았다고 여기는 것은 더욱 위태롭다. 착한 일을 하더라고 유명해지지 말고, 나쁜 짓을 하더라고 형벌에 걸리지는 말라.”

장자는 사람들이 미인 대회를 열어 고르고 고른 미인이라도 물고기가 보고는 물 속으로 숨고, 새들에게 다가가면 날아가 버리고, 사슴이 보고는 결사적으로 도망칠 것이니, 미인 대회에서 뽑은 미인은 진정한 미의 기준에 맞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편견이 만들어 낸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자본주의 사회가 조작해 낸 욕망의 굴레 속에서 진정으로 자기가 무엇인지 모르면서 그저 통속적인 목표를 향하여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것은 인간이 소의 코를 꿰고 말에 재갈을 물릴 때 이미 예고된 일인지도 모릅니다.

맹자

맹자는 감각 기관이 하고자 하는 대로 따라가는 사람은 소인이고 마음이 하고자 하는 옳은 방향대로 따라가는 사람이 군자이며, 감각 기관은 천한 것이고 마음은 귀한 것이라고 합니다.

맹자는 군주들을 향해 민중을 위하라고 했을 뿐만 아니라, 가장 귀한 것이 백성이고 그 다음이 국가이며 가장 가벼운 것이 임금이라고까지 하였습니다. 그래서 백성의 마음을 잃으면 천하를 잃는 것이라고 하였고, 한 걸음 더 나아가 덕이 없는 임금, 즉 백성들이 따르지 않는 임금은 갈아엎어야 한다고까지 했습니다.

맹자는 호연지기가 온 세상을 꽉 채울 수 있는 도덕 기운임을 밝힙니다. 호연지기는 밖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실천을 통해 쌓은 정당함에서 나오는 기운입니다.

호연지기를 가진 사람은 구체적으로 어떤 사람일까요? 맹자는 세상에 살면서 올바른 자리에 서서 도를 실천해 가는 사람으로 보았습니다. 이런 사람은 부귀로 유혹해도 마음을 바꾸지 않고, 위협이나 무력에 굴복하지 않으며, 가난 같은 어려운 상황도 마다하지 않는 사람입니다. 맹자는 이런 사람을 대장부라고 하였습니다.

순자

순자는 인간의 화와 복은 오직 인간 자신의 노력에 달려 있다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순자의 생각은 인간의 지위와 실천을 극대화시킨 인문 정신의 완성이었습니다.

법가

“사람은 이기적 목적으로 주고 받는다. 이해 관계가 맞으면 낯선 사람이라 할지라도 서로 화목하게 살 것이고, 이해가 충돌한다면 아비와 자식 사이라도 서로 충돌할 것이다.”

“수레 만드는 기술자는 사람들이 모두 부귀해지기를 바라고, 관을 짜는 기술자는 사람들이 일찍 죽기만 기다린다.”

“나라 안의 사람들은 너도나도 병법을 말하지만 우리의 군대는 자꾸 약해지고 있다. 이것은 병법을 이야기하는 사람은 많으나 무기를 드는 사람은 적기 때문이다.”

“법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바뀌어야 하고, 정치란 현재의 긴박한 사정에 부합해야 한다.”

기타

과거 선비들은 10년을 공부해야 한문의 이치를 터득한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경험적인 부분이 많다는 얘기입니다. 동양 철학이 논리성이 부족하다고 지적받는 근본 원인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철학의 생명은 비판에 있습니다. 비판은 비판받는 사람들을 반성하게 만드는 기능을 갖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논리라 할지라도 비판을 받지 않으면 더 이상 발전하기 어렵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동양 철학에 흥미를 느끼면서 한편으로 무언가 기대를 갖고 있습니다. 마치 만병 통치약이나 구세주를 기다리던 사람들처럼 말입니다.

동양 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에게 동양 철학의 유행이 반갑지 않을 리는 없습니다. 그러나 무작정 반가워야할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복고풍 속에서 100여 년 전 동양을 짓밟아 오던 서양의 총칼이 다시 보입니다. 또 다른 오리엔탈리즘의 부활인 셈입니다.

도덕 없는 자본주의는 짐승만도 못합니다. 자본주의의 논리는 자본의 논리입니다. 자본은 선악을 따지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윤이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자본이 모이기 마련입니다. 권력과 재벌이 결탁하여 온갖 못된 짓을 하고도 법에만 걸리지 않으면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세상, 돈이 되는 일이면 사람까지 팔고 사는 세상, 이 속에서 논의해야 할 도덕의 문제는 무엇을 하기 위한 도덕인가입니다. 그리고 그때 얼마나 도덕적이냐 하는 것은 얼마나 남을 위해 자신을 버릴 수 있는가의 문제로 나타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