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석

에어로프레스 - 앨런 애들러

대학생 시절 샀던 $30짜리 에어로프레스를 쓴지 벌써 8년이 됐다. 어쩌면 내가 가장 오래 그리고 많이 사용한 물건인데 자세히 아는 것이 딱히 없다는 게 새삼스레 이상하게 느껴졌다.

에어로프레스는 누가 만들었을까? 사람들은 왜 에어로프레스를 좋아할까?

혹시 모른다. 궁금증을 없애면 모닝커피 맛이 더 좋아질지.

발명가 앨런 애들러 Alan Ad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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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부터 원시적인 재료로 뭐든지 만드는 걸 좋아했습니다. 한번은 집 근처 철도 위에 못을 감아두고 납작하게 눌린 철로 미니어처 검을 만들기도 했어요. 만든 물건은 친구들이 가진 다른 장난감과 교환했고요. Alan Adler

에어로프레스는 커피 전문가나 기업이 아닌 당시 67세 엔지니어 앨런 애들러가 발명한 제품이다.

그렇다면 애들러는 누구인가?

  • 애들러는 젊은 날 전투기, 잠수함, 원자력 발전소와 같은 제품 설계자로 일했고 이후 스탠포드대 기계공학 강사로 활동했던 기술자다.
  • 대학 교육 없이 독학으로 공학을 공부했고 특허만 40개 이상 가지고 있다.
  • 발명한 대표적인 제품으로는 에어로프레스와 에어로비 프로(Aerobie Pro)가 있다.
  • 80살이 넘는 나이에도 새로운 제품을 만들고 있는, ‘발명가’라는 단어가 찰떡같이 어울리는 사람이다.

애들러가 전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제품을 만드는 방식은 우후죽순 출간되는 ‘OOO 기업이 일하는 방식’과는 사뭇 다르다. ‘특정 제품에 대한 개인적인 불만 → 문제 해결을 위한 발명 → 광고 없는 홍보’로 이어지는 제품 출시 과정은 에어로프레스가 그렇듯 심플하지만 어쩌면 완벽하다.

에어로비 프로와 에어로프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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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로비 프로는 에어로프레스와 더불어 애들러의 제품 철학이 가장 잘 드러나는 제품이다.

1970년대 애들러는 프리스비(Frisbee)와 같이 유행하던 원반장난점에 결점이 있다는 걸 발견하고 새로운 발명에 몰두하기 시작한다. 요트를 디자인하며 익힌 공기역학 지식을 적용하면 자신이 더 멀리 그리고 안정적으로 날아가는 원반을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에 가능한 도전이었다.

8년간 연구 끝에 완성한 새로운 원반은 프리스비보다 3배 가까이 더 날아갈 정도로 압도적인 성능을 보여준다. 이 제품은 결국 1980년 애들러의 원반은 ‘던졌을 때 가장 멀리 나가는 물건’(당시 약 261미터)으로 기네스북 기록까지 세우게 되고, 덕분에 애들러는 장난감 회사 에어로비(Aerobie)를 창업한다.

에어로비 프로가 이룬 성과가 없었다면 에어로프레스는 양산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적어도 ‘에어로프레스’라는 이름은 없었을 것이다). 80년대에만 100만 개 이상 판매된 에어로비 프로가 먼저 애들러의 개인적 호기심이 성공적 제품 개발의 시작점이 될 수 있다는 걸 증명했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커피메이커

에어로프레스 프로토타입만 35가지 넘게 만들었습니다. 새로운 제품을 구상할 때 망할 것 같은 시도를 자주 해보는 편이에요. 틀리든 되든 일단 한번 해보고 작동하는지 봐보는 거죠. Alan Adler

에어로비 창업 후 20년이 지난 2004년, 대표로 일하던 애들러는 직장 동료의 아내와 커피 머신에 대한 불만 섞인 대화를 하게 된다. 당시 유행하던 드립 머신을 사용하던 두 사람은 기계가 내린 커피의 맹맹하고 쓴맛이 싫어 집에서도 제대로 된 커피를 내릴 방법을 찾고 있던 것이다.

대화를 마치고 애들러는 시중에 있는 그 어떤 커피메이커도 자기 기준에 부합하지 않다고 결론을 내린다. 기존 푸어오버(pour over) 방식을 사용한 브루잉이 4-5분이나 걸린다는 것 또한 불만이었다.

결국, 프리스비를 개선하여 에어로비 프로가 탄생했듯, 애들러는 케멕스(Chemex)나 프렌치 프레스(French Press)보다 뛰어난 커피메이커를 만들기로 결심한다.

애들러는 먼저 주변 지인들을 상대로 블라인드 테스트를 진행한다. 조사를 마친 후 의외로 대부분 80℃–85℃로 내린 커피를 가장 선호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 가설을 세운다. ‘만약 낮은 온도가 더 맛있는 커피를 만든다면 짧은 추출 시간도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지 않을까?’

일단 이 생각은 정확했다. 짧은 추출 시간은 커피의 쓴맛 대신 단맛을 돋보이게 했다.

애들러는 이 결론를 기반으로 커피 빈이 젖어 있는 시간을 최소화하여 최대한 빠르게 커피를 내릴 수 있게 하는 디자인을 구상한다. 초기에는 원뿔 모양 케이스에 커피를 넣고 넓은 면에서 좁은 면으로 압력을 가하는 방식을 고안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자 밀폐된 공간에서 압력을 가하기 위해 원기둥 모양으로 여러 프로토타입을 만들어 비교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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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프로토타입은 원기둥 위에 자전거 펌프 손잡이를 붙여놓은 것처럼 보이는 모양에서 차츰 지금의 에어로프레스와 같이 간결한 모양을 띠는 제품으로 진화한다. 이후 몇몇 지인에게 선물하여 일주일간 사용하도록 부탁하여 반응을 살피고, 제품이 쉽게 넘어진다는 피드백을 토대로 제품 하단부를 6각형으로 수정한다.

2005년 판매를 시작한 에어로프레스는 첫 3년간 저조한 판매율을 경험한다. 하지만 2008년부터 커피 덕후들 사이에서 유명해지기 시작하더니 줄곧 성장하여 10년간 총 1,000만 개 넘는 판매를 기록한다. 전문가들이 객관적으로 뛰어난 성능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데만 3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에어로프레스가 성공한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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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어로프레스 사용자가 만족하는 이유에는 뛰어난 기능이 큰 부분을 차지한다.

  • 누구나 1분 안에 배울 수 있을 정도로 사용이 쉽다. 뚜껑을 맞추고 원두를 넣은 후 뜨뜻한 물을 붓고 지그시 누르기만 하면 커피 한 잔이 뚝딱 나온다.
  • 사용 후 커피 찌꺼기를 깔끔하게 처리할 수 있어 피스톨 밑부분만 씻어주면 뒷정리도 간단히 끝난다.
  • 가격이 비교적 저렴하다(~4만 원). 종이 필터(350장에 ~6천 원) 같은 경우 적어도 3-4번은 재활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에어로프레스가 많은 사람들에게 커피메이커 이상의 의미를 가지는 데는 기능 외적으로도 뚜렷한 이유가 있다.

월드 에어로프레스 챔피언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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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인들은 자기들 야구 리그를 ‘월드 시리즈’라 부르는데, 우리라고 ‘월드 챔피언십’이라고 부르지 못할 이유는 없지. Tim Wendelboe, 월드 에어로프레스 챔피언십 창시자

2008년 팀 윈들보(Tim Wendelboe)와 팀 바니(Tim Varney)는 노르웨이 오슬로에서 첫 번째 월드 에어로프레스 챔피언십을 개최한다. 당시 참가자는 3명, 심사위원은 단 한 명일 정도로 작았지만 이제는 매년 60개국 120개 지역에서 챔피언십이 열릴 정도로 큰 영향력을 가진 대형 이벤트가 되버렸다.

애들러나 그의 회사 에어로비는 생각지도 못한, 어찌 보면 커피 덕후 2명의 순수한 열정과 장난으로 시작된 월드 에어로프레스 챔피언십은 어느새 각 지역 우승자들이 모여 경쟁하는 ‘커피 올림픽’과 같은 무대로 변신했다.

단순하면서도 다채로운 커피 메이커를 아끼는 팬들이 독립적으로 대회를 주최하면서 커피 시장에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광고 없는 성장

저희는 광고를 거의 하지 않습니다. 커피에 관한 글을 쓰는 사람이 우리 제품을 사용해 볼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이 전부예요. Alan Adler

에어로프레스와 같이 광고를 하지 않는 제품은 소비자를 팬으로 만드는 고유한 힘이 있다. 구매 결정이 전적으로 자신이 내린 선택이라 생각해서 그런지 제품을 만족스럽게 사용했을 때 느끼는 뿌듯함이 남다르기도 하다.

커피를 진심으로 좋아하는 사람에게 어쩌면 에어로프레스는 가장 재밌는 장난감이다. 몇몇 에어로프레스 사용자들이 에어로비 직원처럼 일하는 걸 보면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Aeroprecipe는 수백 가지 에어로프레스 레시피를 모아둔 웹사이트이고 Mile High Aeropress Club은 비행기나 산 정상 같은 고도에서 에어로프레스로 커피를 내려 마시는 사람들을 위한 페이스북/인스타그램 클럽이다. 에어로프레스 매출에 분명 긍정적 영향을 끼쳤겠지만, 둘 다 에어로비의 후원을 받지 않고 자발적으로 만든 서비스/캠페인이다.

살아남는 제품

신상이 1년 후 구형이 돼버리는 시대에서 에어로프레스는 15년 간 굳건히 살아남고 있다.

에어로프레스 모든 모델을 수집하는 사람들도 있고, 에어로프레스 챔피언을 꿈꾸며 레시피를 연구하는 바리스타들도 있다.

무엇 때문에 이 커피 메이커가 이토록 사랑받는지는 애들러도 잘 모른다. 분명한 건 한 사람의 집요한 호기심이 완벽에 가까운 제품을 만들었고, 이 제품을 발견한 (나를 포함한) 커피 덕후들이 ‘에어로프레스 홍보대사’를 자처한다는 것이다.